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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감수성

낯선 2n세에 대한 회고

bl☺︎g 2018. 6. 2. 16:25

부모님은 벌써 12년 전 졸혼을 하셨다. 

지금에야 졸혼이라는 세련되고 합리적인 이름이 붙여졌지만 그때만 해도 거주지를 옮긴 쪽에게 ‘집을 나갔다’라던가 ‘도망 나갔다’와 같은

폭력적인 수식이 붙던 때였다. 

우리 가족의 경우 졸혼을 선언한 건 엄마였고 거주지를 옮겨 나간 것도 엄마였다. 

내가 대학 신입생의 흥분된 일상을 보내느라 달콤한 피곤에 절어 살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엄마 이제 나가 살 거야.” 


짐을 싸고 있는 엄마를 ‘울면서 말려봐야 하나’ 싶었지만 그 어떤 가벼운 신파도 연출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아버지는 지방 출장이 잦았고 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엄마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익숙했던 집은 한순간에 낯설어졌다. 엄마의 짐이 빠진 자리보다 엄마에게 선택받지 못하고 남겨진 짐들이 보였다. 

주인을 잃은 스카프와 반짇고리와 커피잔과 머리핀과 베개가 보였다. 

남겨진 짐들은 말이 없었고 덕분에 집은 고요했다.


다행히도 대학 신입생이었으므로 바깥 생활은 여전히 활기찼다. 게다가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전화하는 엄마도 없었다. 

전투적으로 놀고먹는 대학 생활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나의 사정을 말하지 못했다. 소심하고 자존심 높고 고집도 세서 그랬다. 

엄마의 부재를 이유로 나를 불쌍히 여길까 두려웠고 역시 같은 이유로 나를 깎아내릴까 걱정했다. 

나중에 생각해 봤을 때 나를 불쌍히 여기고 깎아내린 건 나 자신뿐이었다. 


스무 살은 성인의 세계에선 갓 태어난 짐승과 같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났다. 

주량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듯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는 했다. 

또 그때의 나는 슬픔에 대한 한계를 시험해 보려는 사람 같았다. 때마침 하염없이 슬퍼할 명분도 있었으므로 

시간이 날 때마다 한계치까지 슬퍼했다. 


눈물이 양옆으로 흘러 귓구멍에 고여도 눈물을 닦지 않았다. 

콧물로 머릿속이 꽉 차도 풀어내지 않고 버텼다. 

온 동네가 떠나가라 엉엉 울었다. 

입을 꽉 막고 음소거된 울음을 울었다. 

포효하듯 손에 잡히는 대로 던지고 부셔가며 울었다. 

이를 악물고 부러질 듯 아픈 울음을 울었다.


그렇게 울고 나면 어지럽다. 나는 사라지고 동맥만 남은 듯 온몸으로 맥박을 느낀다. 그럴 땐 어두운 우주를 표류하는 뗏목 위에 있는 듯했다. 슬픔은 방화범처럼 불꽃같은 울음을 던지고는 도망가 버렸다. 슬퍼서 울었는데 남은 건 지끈거리는 머리와 풀어쓴 휴지 조각뿐이었다. 

운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무모하게 슬퍼하는 일은 잦아들었다. 

여전히 집에서는 마음이 텅 비고 또 슬펐지만 그 감정에 나를 파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의 뗏목은 기착지 없이 부유했다. 부유했다기 보다 풍랑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직장인은 되기 싫다는 맹랑한 생각으로 취업 준비도 해놓지 않았고 호기롭게 도전했던 일들도 늘 미미하게 끝이 났다. 

그 즈음 ‘자존감’이라는 말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자존감’이 마이너스 상태였다. 하루에도 여러 번 괴롭고 외롭고 우울했다. 그러는 새에 낮과 밤 사이가, 꿈과 현실 사이가 모호해져 갔다. 잃는지도 모르게 나를 잃어갔다.


그때 꾸었던 꿈 중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다.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면의 신호가 동시에 초록불로 바뀌고 사람들은 우르르 앞으로 옆으로 대각선으로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갈 곳이 없어서 걸어나갈 수 없었다. 

하다못해 비둘기들 마저 신호를 보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와중에 갈 곳이 없어서 길을 건너지 못하고 

다시 빨간불이 될 때까지 제자리에 서있었다. 시멘트 가루처럼 차갑고 곱게 부서진 마음이 만져지는듯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방황했다. 방황이 1년에서 멈춘 건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 이유들은 모두 사소해서 전부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비가 많이 오던 계절에 보러 갔던 전시가 마음에 점 하나를 찍었던 기억이 난다. 

경기도 미술관에서 하는 ‘패션의 윤리학’이라는 전시였다. 

왜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2시간 가까이 걸리는 안산의 미술관에까지 전시를 보러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시간이 많아 서랄 수밖에 없다. 


그날 거기서 뭘 봤는지도 기억은 잘 나지 않는다. 

다만 전시에 참여한 모두가 미래를 향해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이었다. 

건강하고 쾌적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꾸고 그런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 당시의 나에겐 그런 느낌이 매우 생경했다.

그리고 뭘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힌트를 얻은 것 같았다.


그 해가 지나고 반년의 취업 준비를 거쳐 이듬해 여름 취직이 되었다. 

직장인만은 되기 싫었던 적 없었던 것처럼 열심히 적응하고 열심히 일했다. 

나의 뗏목은 고요히 부유할 새 없이 계속해서 전진했다. 그렇게 8년이 지났다. 


작년 가을 안산의 결혼식에 갔다가 경기도 미술관이 생각나 잠깐 들렀다. 전시를 볼 참이었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아 전시는 보지 않았다. 미술관 내 카페에 앉아 배선생에게 몇 년 전 혼자 여길 다녀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마음속엔 아주 많은 말이 떠올랐지만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갔다. 

누구나 겪었을 과정이고 나만 특별할 것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달고 텁텁한 베트남식 커피를 훌쩍 마셔버리고 경내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바람은 불었지만 좋은 날씨였다.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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