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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감수성

우노빌딩, 303호

bl☺︎g 2018. 6. 2. 16:49

회사는 도산공원 사거리에 있었다. 우리 집은 부천이고 비역세권이었어서 출근을 하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 

업종은 ‘웹에이전시’. 회사의 아이덴티티는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쉽’이었고 회사 내에서 나의 아이덴티티는 ‘막내’였다. 

회사의 규모는 작다. 직원은 겨우 일고여덟. 

나를 빼고는 모두 실장, 이사, 차장, 팀장, 대리, 주임과 같은 직함이 있었다. 


사무실의 월세는 월 350만 원이었고 회의실의 의자는 개당 50만 원이었다. 

그것도 어느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모조한 가품이어서 그 값이라고 했다. 

어느 날 실장은 ‘타이포그래피 아트’라며 노란색 바탕에 검정 글씨가 프린트되어있는 액자를 사다 사무실에 걸었다. 

300만 원을 주었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며 자신의 안목을 과시했다.

평균 주 50시간 일하는 나의 월급은 세후 113만 원이었다. 


회사의 주 클라이언트는 의류 브랜드 회사여서 신상품이 나오는 여름의 끝과 겨울의 끝에 일이 몰려있었다. 

사실 여름이고 겨울이고를 따질 것 없이 늘 직원보다 일이 더 많아서 직원들은 모두 야근을 한다. 

주로 막차시간까지 일을 하다 집에 보내어지곤 했는데 그 이유는 내 집이 회사에서 멀기 때문에 택시비를 주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 근거로 회사에서 택시로 15분 거리에 사는 팀장은 나보다 겨우 20분 더 일하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갔고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못해도 1시간 차이가 났다.


기본적으로 그런 회사에 일이 몰리면 직원들은 집에 가지 못했다. 

회사에 면접 보러 갔던 날 한 켠에 쌓여있던 라꾸라꾸와 이불의 의미를 나는 알지 못했다. 

다만 그때 “와 회사에서 자기도 하나보다, 재밌겠다.”라고 밖에 생각하지 못한 우매한 내가 있었다. 


보통은 클라이언트 피티 전 하루, 이틀 정도 회사에서 밤을 새웠다. 

피티가 연달아 있을 땐 거기에 하루, 이틀을 더하면 된다. 피티날, 보통 새벽 대여섯시 정도면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다. 

그럼 그때부터는 한 명씩 돌아가면서 쪽잠을 자고 피티에 동반할 직원들은 근처 사우나에 보내져 사람의 모습을 하고 돌아온다. 

그러다 보면 실장이 현란한 눈화장을 하고 나타나서는 피티 자료를 보며 출발 시간 직전까지 컨펌을 가장한 독설과 짜증을 부린다. 

실장과 그 일행들이 전투에 나서는 전사들처럼 온갖 젠체를 다하고 떠나면 남겨진 직원들은 그제서야 밥도 먹고 세수도 하며 자신을 추스른다.


어느 날엔 간 아침 아홉시까지 일이 마무리되지 않아 모두 1분도 못 자고 일을 했다. 

겨우 피티 시간에 맞춰 실장과 그 일행들이 출발하고 나는 대리와 남아 사무실을 지켰다. 

대리가 먼저 소파에 누워 한두 시간 잤고 나는 내 차례를 기다렸다. 

그리고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순식간에 잠들었고 아마 코를 골았던 모양이었다. 

당시의 나는 코를 심하게 골았다. 늘 피곤했고 그 피곤을 풀 시간도 여력도 없었다. 듣는 이가 짜증을 낼 수 있다고 충분히 이해한다. 


대리는 나를 깨웠다. 코를 골지 말라고 했다. 나는 코를 골지 않을 방법을 몰랐다. 

코를 골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내가 소파에서 일어나 자리로 가서 앉자 대리는 그 소파에 누웠다. 

그 회사를 다닐 때 수도 없이 울어서 그날도 울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퇴근을 하고 집에 가서 누웠다. 보통 그렇듯 불도 켜지 않고 외투도 가방도 벗지 않고 그대로 누웠다. 

내 동생 고양이 쯔뽕이가 겨드랑이를 파고 자리 잡는다. 이틀 만에 집에 온 나를 기다려준 쯔뽕이에게 많이 미안했다. 

고릉고릉하는 소리가 작은방을 울린다. 

이때는 분명히 울었다.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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