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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감수성

내 맘같지 않은 일생

bl☺︎g 2018. 6. 2. 16:06


몇 년 전 친하게 지내는 대학 선배가 자신의 외국인 애인에게 나를 소개했을 때의 일이다. 

“얘는 이름이 OO이고 쿨하고 유머러스해. 또 얘는 OO인데 되게 긍정적이고 밝아.” 

그렇게 소개가 이어지고 내 차례가 왔을 때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얘는 민옥인데 Organize한 애야.”


알듯 말 듯 정확한 단어 뜻이 떠오르지 않아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서 그냥 웃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단어를 검색하니 뜻은 이랬다.


1. (어떤 일을) 준비하다. 2. (특정한 순서, 구조로) 정리하다, 체계화하다. 3.(일의) 체계를 세우다.[잡다]


과연 이런 단어로 사람의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는지 궁금하면서도 그 사람이 나라니 놀랐다. 또 뭔가를 들킨 것처럼 무안했다. 

‘내가? 아, 하긴 나 조금 좀 그렇긴 하지... 근데 그게 티가 나는구나’했다. 그리고 잊었다. 그냥 인상 깊은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했다.


근데 요즘 내가 Organize한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다. 

그것도 거의 매일 밤 말이다. 하루를 마치고 자려고 누우면 내일의 걱정이 시작된다. 

내일 마무리해야 할 업무가 생각나고 업무를 완수하기까지 돌발 변수는 없을 것인지 있다면 그걸 어떻게 처리하면 될 것인지 

미리 대처해 놓는다. 몇 시 전까지 일을 마무리해서 A과장에게 전달하고 피드백을 기다릴 동안 

어떤 업무를 진행하고 있으면 될지 계획도 한다. 


또 저녁 약속에 입고 나갈 춥지도 덥지도 튀지도 없어 보이지도 않을 코디를 떠올려보고 약속 장소까지의 경로를 파악한다. 

지도 어플이 추천해 주는 경로1과 경로2의 성격을 읽고 퇴근시간 그나마 덜 붐빌 경로2를 택한다. 

소요시간과 약속시간을 계산해 몇 시에 나가 몇 분 지하철을 타야 하는지도 검색한다. 

혹시나 내일 출발 시간에 정신이 없을 것을 대비해 화면 캡쳐도 한다. 


이쯤 하면 됐다며 스스로를 다독여 잠을 청해보지만 소용이 없다. 

내일을 넘어 다음 주의 마감, 다음 달 친구의 생일, 8월의 여름휴가까지 고민이 닿고서도 잠들지 못할 때가 많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미래를 먼저 살아봐야 할 것처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친구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행동을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즉흥적인 선택을 했을 때에도 나의 하루는 얼마든지 괜찮고 혹여 당황스러운 일이 생겼을 때에도 잘 헤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오히려 더 즐거울 수도 있다고 했다. 행선지나 행동을 적어 놓고 제비뽑기라도 해서 계획되지 않은 하루를 만들어보라고도 했다. 

나는 친구의 이야기를 눈을 반짝이며 듣고 긍정했지만 마음은 오히려 심란했다. 

아마 나는 모든 행선지와 모든 행동의 모든 조합을 계획하고 있을게 뻔했다.


답답하다. 걱정거리를 걱정하는 거라면 오히려 말이라도 되지 

어제도 살았고 오늘도 산, 높은 확률로 비슷할 내일을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불안해하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된다. 

사실 이유는 알 것도 같다. 

‘걱정의 본질은 집착이고, 집착의 본질은 강박이며, 강박의 본질은 통제력에 대한 갈망’(세상을 여행하는 방랑자를 위한 안내서)이라고 했다. 나는 미래를 통제하고 싶은 갈망에 강박적이고 집착적으로 걱정을 하고 있다. 

내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당황스러운 일 없이 안정적으로 흘러가길 원하는 마음, 아니 그렇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어둡고 깊은 밤 나를 괴롭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리 살아본 내일이 오늘이 되면 어젯밤의 열망과는 다르게 시시한 하루가 되고 만다. 

미리 살아봤기 때문에 시시해진다. 두 번째로 보는 영화가 흥미진진하기 힘든 것처럼 말이다. 

내 맘 같은 내일을 보내고 싶어 오늘을 시시하게 만들고야 마는 이 아이러니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걱정스러운 일생이다.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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