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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감수성

여름남자 배선생

bl☺︎g 2018. 6. 2. 15:57


배선생과는 6년 전 8월에 만났다. 

더위에 맥없이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 나를 안쓰러워 하며 안절부절 못하던 그는 곧 나의 남자친구가 되었다. 


배선생은 여름이 좋다고 했다. 데이트마다 늘 커다랗고 시꺼먼 노스페이스 배낭을 메고 나와서는 어디든 가자고 했다. 

그러나 뚜벅이 커플이었던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걸어서 동네의 큰 공원에 가거나 지하철을 타고 더 큰 공원에 가거나 할 뿐이었다. 

대신에 배선생의 배낭엔 돗자리도 있고 부채도 있고 담요도 물도 있었다. 우리는 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누워 쉰 소리를 하염없이 잘도 나누었다. 


그러나 무더위 속에 나는 더웠고 땀이 흘렀고 배선생은 그걸 곤란해 했다. 흐르는 땀이 데이트에 대한 불만족의 사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사실 그건 어느정도 맞는 말이었다. 더위에 땡볕을 즐기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배선생은 수시로 내 이마를 덮은 머리를 들추어 부채질을 하거나 입김을 불어 땀을 식혀주었고 동시에 여름을 찬양했다. 

수없이 많은 말들로 여름을 칭찬하고 감탄의 말을 뱉었으나 그다지 효험은 없었다. 

연애는 좋았지만 여름은 너무 더웠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도시의 공원의 그야말로 우거져 내린 담쟁이와 잡초를 보고 배선생이 이런 말을 했다. 

“이거야, 이래서 여름이 좋은 거야, 이게 바로 생명의 포화상태 아니겠냐"

그때도 이미 아저씨였던 그답게 아저씨 말투로 뱉은 한 마디였다. 더위에 맥을 놓고 있던 나는 그 ‘생명의 포화상태’란 말에 뇌가 가득차는 느낌이었다. 

배선생을 돌아보며 “오빠 너무 시적인거 아니냐”고 했다.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반하고 마는 연애 초기였지만 그렇게 확실하고 강렬한 느낌으로 반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날 이후 나도 여름을 좋아하게 됐다. 더위에 이성이 녹아내리고 지랄 맞은 성질이 튀어나올 때면 늘 배선생의 ‘생명의 포화상태’라는 말을 떠올렸다. 

치열하게 뻗어나가는 자연 속에 나 역시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으로 잠시 마음에 최면을 걸고 

얼른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거나 시원한 곳에 들어가거나 하며 여름에 대한 호감을 지켜왔다. 


여름남자 배선생의 단점은 날씨가 추워지고 계절이 바뀌면 머리칼을 잃은 삼손이 힘을 잃는 것 처럼 삶의 재미를 잃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울의 막바지인 지금 그는 아직 헐렁한 내복 속에 웅크리고 있다. 

여름이 빨리 오는 건 반갑지 않지만 배선생에 생기를 불어넣어줄 여름이 기다려지긴 한다.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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