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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었는데 비가 왔고 비가 올 줄 알았던 나는 들고나간 비닐우산을 펴들었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길가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뒤적이다 유튜브로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자갈밭의 돌멩이가 부딪히듯 단단하고 맑은 첫 음에 단숨에 뺨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 한기를 매만질 새도 없이 햇살 가득한 푸른 들판에서 하얗고 깨끗한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긴 머리의 소녀들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다 불쑥 화면을 보는 눈에 집중되었던 피가 코 끝으로 몰려가며 찡-했다. 황당한 마음에 찡한 감각을 참아보았지만 그럴수록 코는 더 아팠다.
다물어진 입안에서 쪄진 듯 뜨거운 숨을 내쉬며 감정을 환기시켜보지만 이내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눈물은 솟았지만 떨구지는 않으리라,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떠보고 고개도 들어보았지만 결국 잠시 훌쩍이고 말았다.
누군가 보았다면 인간극장 같은 슬픈 사연을 보았나 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원래도 나는 잘 운다. 스스로의 감정 때문에도 잘 울고 영화나 TV를 보면서도 쉽게 운다. 말하자면 감정적이고 신파가 잘 먹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눈물에 익숙하다. 그런데 이런 눈물은 황당하다.
‘대체 왜? 이렇게 어여쁜 것을 보고 대체 왜?’라며 주책맞다고 나 자신을 혼내지 않을 수 없다.
실은 이런 황당한 눈물이 처음은 아니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의 무대를 보았을 때 처음으로 ‘어여쁜 것’을 보고 코가 찡-했다.
길고 가느다란 팔다리를 씩씩하게 뻗어가며 잘은 몰라도 마음이 뭉클해지는 가사의 노래를 부르는 그걸 보고 찡-했고 눈물이 났다.
이후로도 종종 이런 찡-을 경험했는데 매번 황당했고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황당한 찡-’의 처음을 찾는다면 아무래도 중학생 때의 일이 생각난다. 등교 준비 중이었고 아침밥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먼 나라에서 개최된 까닭에 이른 아침에 중계되는 동계올림픽 경기가 나왔다.
쇼트트랙 결승전 중계였고 차-악, 차-악 얼음을 가르고 나가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치열함이랄까 투지랄까, 정확히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싸였다.
밥 먹는 것도, 등교 준비를 하는 것도 잊고 뜨거워진 머리통을 느끼며 경기를 지켜봤다.
그러다 제일 빠른 선수가 결승선에 가까워지는 걸 보고 코가 짜르르해지며 눈물이 고였다.
그때 당시에도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엉엉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울음으로 번지기 전에 황급히 눈물을 식혔다.
목구멍을 꽉 막아버린 고구마 덩이를 삼켜낼 때처럼 간신히 해냈다.
그래도 마음은 조금 더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왜 이렇게 주책 맞고 황당한 찡-이 오는 걸까. 한심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간절히 갈망하던 어딘가에 도착해 내는 누군가를 보며 단지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해 주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고생의 끝과 환희의 시작이 연결된 지점을 바라보며 고생의 끝까지 오는 동안의 노력과 고통을 알아주고
앞으로의 기쁨을 열렬히 축하해 주느라 내 코가, 마음이 그동안 찡하고 짜르르 했다고 말이다.”
-라고 적어보고는 찜찜한 마음이 계속된다.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럴싸하지도 않고 그럴싸한 걸 쓰려고 했다는 게 계속해서 불편하다.
분명한 것 없이 얼버무렸다. 다시 생각한다. 찡-하던 순간을 뜯어보고 곱씹는다.
아차, 하며 묻어둔 감정의 윤곽이 선명히 드러난다.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이 아니라 결승선에 다다른 선수를 볼 때 찡-했다. 결승선을 통과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 때는 냉담했다.
결코 축하의 찡-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극한의 치열함을 이겨내는 선수를 보며 그동안의 고통과 노력에 대한 상상이 겹쳐 보였는데, 나는 이때 막연하고도 압도적인 패배감을 느꼈다.
그런 순간을 경험한 그들이 부럽고 그런 순간을 나는 평생에 한 번은 경험해 볼 수 있을까 싶었고,
그런 순간을 위해 저 사람처럼 노력한 적이 있었나 반문했고, 나는 그럴 여력도 능력도 없다고 체념했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게 억울하고 질투나 코가 찡-했다.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덮어놓고 외면하던 감정을 인정하고 나니 적어도 주책맞은 눈물은 아니라는 생각에 개운하다.
그리고 주책맞은 것보단 질투가 말이 된다. 앞으로는 이런 황당한 찡-에 익숙해질 것 같다. 아니 더는 황당하지 않을 것 같다.
예쁘고 늘씬한 애들이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고 노래마저 좋은 와중에 이다지도 열심히 하다니, 질투는 당연하다.
전구 하나가 마음속에서 껌뻑껌뻑 하더니 퍽, 꺼졌다. 아니 탁, 켜졌다.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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