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안 갔어. 근데 그 수업은 되게 좋은 수업이야. 그 쌤 역시 내공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한자리에서 같은 강의를 10년간했다는 건 어지간히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근데 안 갔어. 마지막 수업이었고 뒤풀이도 예정되어 있었어. 과제는 제출하지 않았지만 유종의 미를 위해서라도 출석해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수강생 과제를 꼼꼼히 첨삭해 주는 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어서 커리큘럼 이외의 알짜배기 팁들을 들을 수 있거든. 두 시간의 수업을 듣고 뒤풀이 자리에 갔다면 그동안 이름은커녕 얼굴도 다 익히지 못했던 다른 수강생들과 얘기도 나누고 쌤한테서 좋은 얘기들을 들었을지도 몰라. 나름 연말 분위기도 내고 맥주도 한 잔하고 좋았겠지. 근데 안 갔어. 수업 전 날이 휴일이라 모처럼 기운 내서 글을 ..
여자는 여덟자매 중 일곱번째 딸이었다. 전북 정읍의 산골마을 출신인 여자는 첫째언니와 21살차이가 나고 큰조카보다 간신히 1살이 많았다. 여덟자매가 태어나는 동안 끝끝내 장손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지 못한 관계로 여자를 포함한 몇몇 자매들은 쉽게 잉여스러운 자식들이 되어 이름대신 ‘딸년들’같은 호칭으로 불렸다. 숨죽인 존재감 만큼 여자는 조용했고 쉽게 양보했고 웬만한건 받아들이며 많은 것을 참았다. 스무살이 되던 해 대학공부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아무도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서울로 떠나온 것만으로도 여자에게는 커다란 성취였다. 부모님은 ‘딸년들’이 대학에 가는 것 보다 취직을 해 돈을 벌어오길 원했고 일찌감치 출가를 해 가정을 꾸린 언니들은 동생들을 쉽게 쓸 수 있는 인력쯤으로 대했..
낮이었는데 비가 왔고 비가 올 줄 알았던 나는 들고나간 비닐우산을 펴들었다. 약속시간보다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길가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뒤적이다 유튜브로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의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자갈밭의 돌멩이가 부딪히듯 단단하고 맑은 첫 음에 단숨에 뺨까지 소름이 돋았다. 그 한기를 매만질 새도 없이 햇살 가득한 푸른 들판에서 하얗고 깨끗한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긴 머리의 소녀들에게 빠져들었다. 그러다 불쑥 화면을 보는 눈에 집중되었던 피가 코 끝으로 몰려가며 찡-했다. 황당한 마음에 찡한 감각을 참아보았지만 그럴수록 코는 더 아팠다. 다물어진 입안에서 쪄진 듯 뜨거운 숨을 내쉬며 감정을 환기시켜보지만 이내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눈물은 솟았지만 떨구지는 ..
그는 올해 61세가 된 기념으로 연초에 가족들과 단출한 환갑을 치렀다. 고급 일식집에서 코스요리를 먹었던 그날이 그는 눈물겹게 좋았다. 기뻤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서 ‘눈물겹다’거나, ‘기쁘다’거나하는 감정을 건져올릴 수 없었다. 그저 둥기둥기 붕 떠오르는 기분에 동요되지 않도록, 그 기분이 얼굴에 피어나지 않도록, 누름돌처럼 입술을 꽉 다문 미소를 짓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과묵했다. 옛날 아버지들이 대체로 과묵하지 않냐 하더라도 그는 유난히 과묵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랬다. 젊어서 연애를 할 때조차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편지로 대신했다. 그는 자식 둘을 낳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면서 고달팠다. 그리고 그의 과묵은 점점 더 무게를 더해만 갔다. 재잘대며 커가는 자식들에게 적절한 반응..
내 몸이 싫었다. 싫었다기 보다 ‘나’라는 존재 안에 몸을 포함시켜주지 않았다.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내 몸이 제일 맘에 안 들었으므로. 그렇다고 내 몸을 내 마음에 들게 바꾸는 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생각만으로도 무기력해졌다. 대신 빠르고 간편한 정신승리 쪽을 택했다. 길 가다 지나치는 유리창에 나를 비춰보지 않았다. 몸에 대한 대화를 피했다. 내 몸이 아닌 척, 나는 몸이 없는 척, 두 손으로 내 눈만 간신히 가리고 살았다. 그동안 내 몸은 점점 커졌고 상했고 쓸쓸해졌다. 정신도 이상해졌다. 분명히 존재하는 무거운 몸을 하염없이 부정하고 외면하기엔 정신이 버텨내질 못했다. 늘 예민하고 스트레스가 가득 찼다. 어쩌면 아무도 주지 않았을 상처들을 능동적으로 빼앗아 들고는 스스로 상처 입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