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당신의 나날들

1인분의 삶

bl☺︎g 2018. 6. 2. 17:16

여자는 여덟자매 일곱번째 딸이었다

전북 정읍의 산골마을 출신인 여자는 첫째언니와 21살차이가 나고 큰조카보다 간신히 1살이 많았다

여덟자매가 태어나는 동안 끝끝내 장손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이 태어나지 못한 관계로 

여자를 포함한 몇몇 자매들은 쉽게 잉여스러운 자식들이 되어 이름대신딸년들같은 호칭으로 불렸다

숨죽인 존재감 만큼 여자는 조용했고 쉽게 양보했고 웬만한건 받아들이며 많은 것을 참았다.


스무살이 되던 대학공부를 위해 서울로 상경했다

아무도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지 않았지만 서울로 떠나온 것만으로도 여자에게는 커다란 성취였다

부모님은딸년들 대학에 가는 보다 취직을 돈을 벌어오길 원했고 

일찌감치 출가를 가정을 꾸린 언니들은 동생들을 쉽게 있는 인력쯤으로 대했다

그런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해서든 학교를 다니고 싶었지만 끝내 졸업은 하지 못했다

생계에 발목잡혀 돈을 벌다보니 학교에서 멀어지더랬다


그렇게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이는 재미에 돈만 벌던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다섯째 언니의 간곡한 부탁에 못이겨 그동안 모은 돈을 언니네 아파트 전세 보증금으로 보태넣고 언니네 부부와 함께 살게 됐다

그러면서 낮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형부가 운영하는 이자카야 일을 도왔다. 


서른 살이 되던 . 1 즈음 만나온 남자친구에게 청혼을 받았다. 순종적이고 자상한 남자였다

공기업 정년퇴직을 아버지와 부동산 사업을 하시는 어머니 밑에서 자란 바르고 건실한 남자


진실한 고백에 결혼을 승락하고 추석연휴에 맞춰 양가에 인사를 드리러 다녔다

남자의 부모님은 듣던대로 좋으신 분들이었지만 그런 가족간의 화목함과 자상함이 낯설어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게다가 남자의 고향인 부산에서 정읍으로 떠나 바로 여자의 부모를 만났어야 했는데 

남자의 집안과 여자의 집안 분위기는 너무도 달랐고 그런 괴리를 아는 여자는 괴로웠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없는게 컴플렉스인 여자의 아버지 비위를 맞춰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있는 셋째 형부가 

쓸데없이 고압적인 분위기를 만들며 남자를 주눅들게 했다

아들 없는 집이라고 무시하지 말라 주된 메세지였다

여자의 아버지는 그런 형부가 아들처럼 든든했는지 반주가 과해지더니 밤이 되기도 전에 골아떨어졌다

남자는 웃으며 넘겨주었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의 치부가 드러난 듯이 괴로웠다.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상견례 날짜가 잡히자 결혼준비는 진지해졌다

남자는 남자의 부모님이 마련 놓으신 아파트에 대해 얘기했고 여자는 자기가 모은 돈에 대해 얘기했다

통장에 3천만원, 언니네 아파트 보증금에 6천만원. 어떤 사치도 낭비도 없이 10년간 모은 여자의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 카페 아르바이트 휴무일. 모처럼 홀로 집에서 쉬던 날이었다

집주인이라며 찾아온 아주머니가 꺼내놓는 얘기는 여자를 당혹케 했다

언니네 부부와 함께 살던 아파트는 전세가 아니라 150짜리 월세이고 벌쎄 세달째 세가 밀렸다고 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는 아주머니에게 적금을 월세를 주어 보낸 여자는 길로 언니에게 찾아가 사정을 물었다

여자의 6천만원이 아파트 보증금의 전부이고 이미 조차도 야금야금 갉아먹어 온전치 못하다고 했다

여러번의 사업실패로 몇천 단위의 빚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런 지경일 줄은 생각치 못했다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언니네를 길바닥에 나앉게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에게 사정을 털어놓으며 결혼이 어그러져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의 입장을 존중했고 여자는 남자에게 고마웠지만 어쩐지 빚을 마음이었다.


상견례는 여자의 부모가 연로하신 이유로 여자의 고향 근처에서 하게 되었다

남자의 부모와 남자, 그리고 여자의 부모와 여자. 여섯이 모여 혼담을 주고 받기로 자리였다

아침 일찍 남자와 함께 서울에서 출발해 상견례자리에 도착한 여자는 당혹스러웠다

상견례자리에 넷째 언니네 부부와 아직 초등학생인 조카들이 함께 와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아들없는게 컴플렉스인 여자 아버지의 독단이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붉어지는 같았다

마음 속의 어떤 감정이 덩어리처럼 얽히는 느꼈다

역시 아침 일찍 부산에서 출발해 남자 부모님의 배려와 젠틀함과 세련됨이 여자를 더욱 초라하고 슬프게 했다. 


이후 여자는 마음 속에 얽어진 감정에 괴로웠다. 딱히 무엇이라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덩어리로 얽힌 감정은 점점 커지고 딱딱해지며 뜨겁고 아팠다

여자는 문득 자신의 이름을 떠올려 본다. 여자의 이름은민영이었다. 그리고 서른 해가 넘는 삶에서 얼마만큼민영이었는지 떠올려본다

언제나 남들보다 희생하고 양보하느라 몫의 삶을 살고 있지 못했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여자는 따갑고 어지러운 울음을 울컥 쏟아냈다

깊고 아픈 울음이었다

여자의 울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는데 이유는 앞으로도 여전히 몫의 삶을 없을 거란 좌절감 때문이었다

뒤면 남자와 결혼해 남자의 아내이자 남자 부모님의 며느리가 것이고 나아가 어떤 아이의 엄마가 되면... 여자는 아득했고 울음은 오래 이어졌다. 


여자는 결국 남자에게 파혼을 선언했다. 남자 부모님의 애정어린 관심을 지독한 간섭으로 둔갑시켜 파혼의 이유로 삼았다

남자는 슬퍼하며 붙잡았지만 여자는 물러설 없었다. 여자는 살아야 했다

남자와의 인연을 매듭짖고 여자가 제일 먼저 일은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는 것이었다

여행 다녀본 없어 제대로된 여행가방 하나 없던 여자는 옹색한 비닐 짐가방을 구해다 짐을 꾸렸다

여행 가방에 담지기 못한 짐은 박스에 담아 시골집으로 부쳤다

일곱 자매와 여섯 형부가 모두 여자를 걱정하고 나섰고 다섯째 언니와 형부는 금방 돈을 마련해 돌려준다며 여자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여자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여자는 살고 싶었다. 온전한 1인분의 삶을

여자는 자매들의 애처로운 관심에 발목 잡힐까 잠깐 바람만 쐬고 돌아온다고 했지만 

여자가 예매한 티켓은 편도행이었다. 




#에세이아니고 #보고들은것들로지어낸얘기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

'당신의 나날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번 생의 술  (0) 2018.06.02
비둘기 같은 여자  (0) 2018.06.02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