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사람은 미용실 의자에 앉아있는 동안의 멀뚱함이 싫어서 20대 중반 즈음부터는 제 손으로 머리를 다듬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솜씨가 어쩔 수 없이 엉망진창이어서 같이 살기 시작한 후로는 내 손으로 다듬어 주고 있다. 처음엔 옆사람이 가지고 있던 미용가위 세트로 잘라주었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자연스럽게 길이를 맞추는 것도 머리숱을 정리하는 것도 생각과는 다르게 보통일이 아니었다. 미숙한 내 솜씨에 더해 뒤통수가 뾰족하게 툭 튀어나와 있는 남다른 두상과 그 뒤통수에 자리한 가마 탓에 어떻게 잘라도 바보 같아졌다. 옆사람은 ‘머리는 계속 자라니까 괜찮아’하며 불만족스러운 머리를 받아들였고 나도 ‘그래, 모자 쓰면 되니까’하며 넘겼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미안함이 커서 도서관에서 ‘이발 실무: 남성 커트..
회사는 도산공원 사거리에 있었다. 우리 집은 부천이고 비역세권이었어서 출근을 하는 데만 1시간 40분이 걸렸다. 업종은 ‘웹에이전시’. 회사의 아이덴티티는 ‘크리에이티브 파트너쉽’이었고 회사 내에서 나의 아이덴티티는 ‘막내’였다. 회사의 규모는 작다. 직원은 겨우 일고여덟. 나를 빼고는 모두 실장, 이사, 차장, 팀장, 대리, 주임과 같은 직함이 있었다. 사무실의 월세는 월 350만 원이었고 회의실의 의자는 개당 50만 원이었다. 그것도 어느 유명 디자이너의 작품을 모조한 가품이어서 그 값이라고 했다. 어느 날 실장은 ‘타이포그래피 아트’라며 노란색 바탕에 검정 글씨가 프린트되어있는 액자를 사다 사무실에 걸었다. 300만 원을 주었고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며 자신의 안목을 과시했다.평균 주 50시간 일..
부모님은 벌써 12년 전 졸혼을 하셨다. 지금에야 졸혼이라는 세련되고 합리적인 이름이 붙여졌지만 그때만 해도 거주지를 옮긴 쪽에게 ‘집을 나갔다’라던가 ‘도망 나갔다’와 같은폭력적인 수식이 붙던 때였다. 우리 가족의 경우 졸혼을 선언한 건 엄마였고 거주지를 옮겨 나간 것도 엄마였다. 내가 대학 신입생의 흥분된 일상을 보내느라 달콤한 피곤에 절어 살던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엄마 이제 나가 살 거야.” 짐을 싸고 있는 엄마를 ‘울면서 말려봐야 하나’ 싶었지만 그 어떤 가벼운 신파도 연출되지 않았다. 나는 엄마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아버지는 지방 출장이 잦았고 오빠는 군대에 있었다. 엄마는 떠났고 나는 남았다. 익숙했던 집은 한순간에 낯설어졌다. 엄마의 짐이 빠진 자리보다 엄마에게 선택받지..
둥근 얼굴, 작은 눈, 빵빵한 몸. 수더분하고 둔해 보인다는 게 민옥씨에 대한 첫인상이다. 민옥씨의 성격도 대개는 그런 외모에 부합한다. 그러나 민옥씨는 종종 악마같은 마음을 갖는다.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 속으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고문하고 죽인다. 하지만 최근의 민옥씨는 자신의 악마같은 마음씨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렇게 자주 악마같은 마음을 먹었다가는 진짜 악마가 될 것 같은 기분에 시달렸다. 언제 그런 악마같은 마음을 갖는지 민옥씨를 관찰해 보자. 민옥씨는 공공장소에서 무신경한 사람들을 불편해 한다. 지하철의 문이 닫히기 전 헐레벌떡 뛰어든 아저씨가 불편했다. 아저씨는 니코틴으로 샤워를 한듯 온몸으로 담배냄새를 풍겼다. 소매를 당겨잡아 코를 막는다. 탁해진 공기가 불편해 아저씨를 향해 페브리즈를 뿌..
알람 소리에 정신이 깨었지만 눈 뜨고 싶지 않다. 간밤에도 잠을 설쳤다. 어제 윤과장에게 들은 몇마디가 좀체 소화되지 않는다. 눈을 뜨려고 하자 눈꺼풀이 말라 짙은 쌍커풀을 만든다. 날씨 탓인지 방이 어둡다. 눈알이 따가워 비비지도 못한 채 꿈뻑거린다. 조금있으면 그들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어쩌지도 어찌할 바도 모른 채, 오늘도 그들의 씹을거리가 되러 간다. 욕실로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짠다. 새치가 부쩍 늘었다.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인데 한 올 걸러 한 올이 흰머리로 변했다. 거울에 바짝 머리를 대고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본다. 어떻게 가르마를 타면 새치가 가려질까 고민하다 포기하고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출근지는 광화문의 모 신문사 재무경영팀으로 삼년 전 계약직으로 입사해 작년 기적처럼 정규직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