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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나날들

이번 생의 술

bl☺︎g 2018. 6. 2. 17:03

그는 올해 61세가 된 기념으로 연초에 가족들과 단출한 환갑을 치렀다. 

고급 일식집에서 코스요리를 먹었던 그날이 그는 눈물겹게 좋았다. 기뻤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서 ‘눈물겹다’거나, ‘기쁘다’거나하는 감정을 건져올릴 수 없었다. 

그저 둥기둥기 붕 떠오르는 기분에 동요되지 않도록, 그 기분이 얼굴에 피어나지 않도록, 

누름돌처럼 입술을 꽉 다문 미소를 짓는 것 밖에 할 줄 몰랐다. 


과묵했다. 옛날 아버지들이 대체로 과묵하지 않냐 하더라도 그는 유난히 과묵했다.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그랬다. 

젊어서 연애를 할 때조차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편지로 대신했다. 

그는 자식 둘을 낳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면서 고달팠다. 그리고 그의 과묵은 점점 더 무게를 더해만 갔다. 

재잘대며 커가는 자식들에게 적절한 반응을 보여주지 못했고 때문에 적당한 유대를 갖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다.


 술꾼이었다. 사실 그는 술꾼, 술고래, 말술 등등의 말들을 모두 이어붙여도 부족했다. 

그의 형제들 역시 모두 술을 잘 마셨다. 때문에 명절에 그의 고향집에선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가장 술이 센 큰형과 자신과 바로 아래 동생 셋이서는 술을 한 궤짝 씩 차지하고 앉아 마시곤 했다.  


소주잔으로 홀짝이는 것으로는 감질나 글라스로 콸콸 따라 마시던 세 형제의 큰형은 벌써 15년 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떴다. 

큰형의 투병과 죽음을 지켜보고도 그는 계속해서 글라스에 소주를 콸콸 따라 마셨다. 

10년 전 동생이 뇌출혈로 쓰려져 거동이 불편해진 걸 보고도 역시 그의 잔은 작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술밖에 없어졌다. 


그는 가끔 술이 적당히 취한 상태일 때 자식들과 어떤 대화를 하고 싶기도 했지만 장성한 자식들은 그런 그를 피했다. 

길에서 만난 취객을 지나쳐버리듯 그랬다. 

사실 그도 그보다 더 많이 배운 자식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의 자식들은 그가 냉장고에서 찰그랑 거리며 소주를 꺼내는 소리만 들어도 목덜미가 쭈뼛했고 그

가 방에서 나와 술병과 술잔을 챙겨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아무도 집안을 돌아다니지 않았다. 

어느 순간엔 서로가 서로에게 무관심해졌고 서로 부딪힐 일이 없어졌다.

 그 불편하고도 다행스러운 긴장은 점점 밀도를 더했다. 톱니바퀴가 맞아 돌아가듯 그랬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했고 점점 더 술밖에 없어졌다.


3년 전 어느 날 밤에도 그는 술과 잔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어둠처럼 침묵하며 소주 네댓 병을 비워냈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가 왼쪽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눈을 떴다. 숨이 가빠 왔고 식은땀이 흘렀다. 

몸을 일으키고 앉아 고통을 다독이며 침착해져보려 노력하지만 정신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다시 누워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기척이 없다. 다시 불렀다. 

역시나 기척이 없다. 더 크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들이 낯설어하며 문 앞에 와  ‘왜요?’하고 묻는다. 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의 방문을 열어 그를 확인한다. 


아들이 부른 구급차를 타고 근처 대학병원에 가 이러저러한 검사를 받고 이튿날 수술을 받았다. 

병명은 심혈관 협착증으로 심장으로 향하는 혈관 중 막힌 혈관 두 개에 철심을 박았다. 

중환자실에 이틀이나 있었고 일반 병실에서도 일주일이 넘게 입원했다. 

그리고 그 병실에서 아주 오랜만에 자식들과 이야기했다. 

다시 한 번 더 술을 마시면 그때는 119도 불러주지 않을 거라는 협박이 섞인 타박이었지만. 

그리고 그토록 길게 술을 마시지 않은 것도 아주 오랜만이었다.


퇴원을 하고 통원치료가 끝나고도 어쩐지 그는 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아내와 자식들의 타박이 유효했다기 보다 그냥 단순히 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 단숨에 바뀌어도 되는 거냐며 그를 아는 모든 이가 놀라워했다. 

그의 딸은 ‘이미 다음, 다다음 생의 술까지 다 먹어버려서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고 좋아했다.


그가 술을 끊자 늘 그를 둘러싸고 있던 벌겋고 불콰한 취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자식들이 재잘대는 이야기가 쌓였다. 

쌓여가는 이야기들 속에서 아들의 고민과 딸의 취향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아내와 자식들의 대화에 자연스레 스며들지는 못했다. 

그래도 덜컹이면서라도 가족들의 대화에 끼어들곤 했다. 

자식들은 그의 이야기를 차근히 기다려주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술에 취해 있는 동안의 시간을 빼면 그는 아직 마흔 초반일 것이다. 

그가 마흔 초반이면 자식들은 중학생일 것이고, 큰 형도 동생도 건강하게 함께였을 것이다. 

그의 곁에 쌓여가는 이야기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즘 후회하는 마음이 자꾸 든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살아온 날들 중 언제 술과 끊어질 기회가 있었는지 찾아본다. 

하나도 없기도 하고 매일이 그렇기도 하다. 

괴로운 마음이 자꾸 든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술 생각이 나지 않는 자신이 낯설고 또 다행이었다.



#에세이아니고 #보고들은것들로지어낸얘기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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