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나날들

비둘기 같은 여자

bl☺︎g 2018. 6. 2. 16:14

알람 소리에 정신이 깨었지만 눈 뜨고 싶지 않다. 간밤에도 잠을 설쳤다. 

어제 윤과장에게 들은 몇마디가 좀체 소화되지 않는다. 눈을 뜨려고 하자 눈꺼풀이 말라 짙은 쌍커풀을 만든다. 

날씨 탓인지 방이 어둡다. 눈알이 따가워 비비지도 못한 채 꿈뻑거린다. 조금있으면 그들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어쩌지도 어찌할 바도 모른 채, 오늘도 그들의 씹을거리가 되러 간다.


욕실로 들어가 칫솔에 치약을 짠다. 새치가 부쩍 늘었다. 이제 겨우 서른 중반인데 한 올 걸러 한 올이 흰머리로 변했다. 

거울에 바짝 머리를 대고 머리카락 속을 헤집어 본다. 어떻게 가르마를 타면 새치가 가려질까 고민하다 포기하고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출근지는 광화문의 모 신문사 재무경영팀으로 삼년 전 계약직으로 입사해 작년 기적처럼 정규직이 되었다. 

95명의 계약직 중 5명만이 정규직이 되었는데 그 중 4명은 누군가의 입김으로 만들어진 자리였으므로 

오직 나만이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살아남았다고 볼 수 있다. 

고졸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회사를 다니며 야간 대학을 졸업했고 서른이 넘도록 계약직을 전전하다 얻은, 꿈에 그리던 정규직이었다. 

나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불행은 그 때부터 시작이었다. 정규직으로 전환되자마다 함께 의지하며 회사생활을 하던 계약직 동료들은 내게 등을 돌렸다. 그뿐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들은 내게 정규직 추천서를 써준 정팀장과 내가 불쾌한 관계라는 소문을 내고 다녔다. 

“진짜래? 누가 봤대?”라는 말대신 “그럼 그렇지”라며 소문은 빠르게 번져갔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정규직 동료들과 지내게 되었느냐 하면, 아니다. 나는 또 다른 벽을 만났다. 

정규직과 계약직을 가르는 벽을 뛰어넘고 나니 이제 나는 공채와 비공채의 벽에 가로 막혔다. 

심지어 이 공채의 벽을 넘는 건 노력으로, 운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회사내에서 혼자가 되었다. 넓디 넓은 사무실 한가운데 내 자리만 유리벽으로 둘러쌓인 것 같다. 

계약직들의 무서운 눈치를 보고 공채들의 유치한 무시를 견디며 한 해를 보냈다. 


며칠전 야근을 하려고 저녁을 챙겨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공채출신의 나대리와 신입사원이 퇴근을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그 분은 왜 늘 혼자 식사하세요?”

 “왜겠니? 그냥 봐도 혼자 먹는게 어울리잖아”

 “호호호 그런가요”

 “그 여자 뭔가 기분나뻐, 계약직 출신이면서 정규직이라고 어깨펴고 다니는 것도 별로. 그 여자 지나갈 때 냄새도 나는 것 같고.”

 

모퉁이에 서있던 나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둘 다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방금 전까지 오간 대화의 주인이 나 인것을 알았다. 

모르는 척 하는 나대리와 눈이 마주쳤다. 나대리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니가 들었으면 어쩔래’라는 투로 나를 마주보았다. 

마음 속으로 많은 말이 솟았지만 얼마간 더 나대리를 바라보다 조용히 사무실로 들어갔다. 

나는 그들에게 나를 설명할 여력이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설명이라고 받아들여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그들은 나의 이야기를 싸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분명하다. 

이런 일엔 익숙하다. 


그리고 어제 윤과장이 조용히 회의실로 나를 호출했다. 

윤과장 이야기의 요는 나의 얼굴을 불편해 하는 직원들이 많으니 좀 편안한 표정을 지어줄 수 없겠냐는 거였다. 

당혹스러웠다. 

나의 얼굴이 어디가 어떻게 불편하다는 건지 나로써는 알아챌 도리가 없었다. 

대화의 끝에 윤과장은 이런 얘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거 혼잣말 하는 버릇도 고쳐줬음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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