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감수성

시간들 속 순간들

bl☺︎g 2018. 6. 2. 16:09

“6년 됐어요.”

“와, 어떻게 그렇게 오래 만났어요?”

“글쎄 헤어지지 못해서?”

“에이, 그게 뭐예요. 사랑하니까 만났겠죠.”

“그냥 시간이 흘렀어요.”


종종 어떻게 6년을 만났느냐고 묻는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적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고심한다.

그러나 그냥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시간들 속 갈등의 순간에 헤어지지 못했다. 

사랑해 왔고 사랑하고 있지만 6년 동안 한시도 빠짐없이 사랑해 온 건 아니다.


내가 옆사람을 사랑하지 않은 순간들은 그가 경찰 공무원 시험에 매달렸던 시간들 속에 있다. 

옆사람의 꿈은 경찰이었다. 사명감으로 무장된 정의로운 경찰이 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경찰 시험에 뛰어든 이후 아주 긴 시간 동안 실패했다. 

경찰이 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합격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옆사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망 없는 일에 젊음을 걸고 있는 그가 한심했다. 실패에 무뎌진 것 같은 그가 두려웠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말하는 입을 믿을 수 없었다. 수없이 갈등했다. 많은 고함과 눈물과 한숨이 있었다. 


그리고 결국 내가 이겼다. 시험을 계속 보려거든 나와 헤어져달라는 요구에 옆사람이 백기를 들었다. 

뜬구름 같은 꿈을 좇는 옆사람을 현실의 진흙 바닥에 주져 앉혔다. 

누군가의 인생에 잔인하게 개입되었다는 생각에 죄책감에 밀려들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갈등이 해소된다면 그 정도 악역이 되는 것은 쉬웠다. 


얼마간은 안도했다. 

그리고 곧장 옆사람이 보통 사회인의 궤도에 오를 것을 기대했다. 

돌이켜보면 진짜 잔인한 부분은 여기다. 꿈을 상실한 사람에게 애도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재빨리 현실에 적응하고 많은 것을 감내하길 바랐다. 옆사람의 상실감과 허전함은 아랑곳 않았다. 

옆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순간은 아마 이 시간들 속에 있을 것이다.


옆사람은 지금 새벽 출근도 마다 할 수 없는 초보 목수가 되었다. 매일 새벽 출근을 하는 옆사람을 배웅한다. 

현관 앞 계단참에 서서 꽝꽝 얼어붙은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나가는 옆사람의 모습을 지켜본다. 

주차된 자동차들에 가려 잠깐 보이지 않았다가 다시 나타난다. 그 잠깐이 가끔 길게 느껴진다. 

길게 느껴지는 잠깐 동안 느닷없이 마음이 시리곤 한다. 

다시 돌아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그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를 생각해 본다. 

그러나 매번 틀림없이 돌아 나온다. 어김없이 씩씩하게 어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그리고 매번 틀림없이, 또 어김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옆사람을 위해 기꺼이 저녁상을 차린다. 

마주 앉아 따뜻한 저녁을 먹고 있으면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던 순간들이 메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분명 위로받고 있다. 잔인하고 지독하고 얼룩진 시간들을 지나 순수한 사랑의 순간들을 아주 잠깐 이어지고 있다.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