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감수성

그래서 안 갔어.

bl☺︎g 2018. 12. 29. 16:05

    그래서 안 갔어. 근데 그 수업은 되게 좋은 수업이야. 그 쌤 역시 내공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한자리에서 같은 강의를 10년간했다는 건 어지간히 쉬운 일이 아니잖아. 


    근데 안 갔어. 마지막 수업이었고 뒤풀이도 예정되어 있었어. 과제는 제출하지 않았지만 유종의 미를 위해서라도 출석해서 자리를 지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거야. 수강생 과제를 꼼꼼히 첨삭해 주는 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어서 커리큘럼 이외의 알짜배기 팁들을 들을 수 있거든. 두 시간의 수업을 듣고 뒤풀이 자리에 갔다면 그동안 이름은커녕 얼굴도 다 익히지 못했던 다른 수강생들과 얘기도 나누고 쌤한테서 좋은 얘기들을 들었을지도 몰라. 나름 연말 분위기도 내고 맥주도 한 잔하고 좋았겠지.


    근데 안 갔어. 수업 전 날이 휴일이라 모처럼 기운 내서 글을 써보려고 종일 카페에 가 있었어. 오전 열한시 반에 커피값 카드 내역이 찍혀있으니 거의 여섯 시간 동안 카페에 있었나 봐. 다섯 시 반에 카페에서 나왔거든. 그 긴 시간 동안 질투에 대해 썼어. 요즘 잘 나가는 젊은 작가에 대한 어이없고도 당연한 질투심에 대해 썼어. 근데 자꾸 마무리가 안되는 거야. 자꾸 교과서적인 답을 쓰려고 하더라고 내가. 예를 들면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말처럼 질투를 동력으로 나도 글을 열심히 써보자! 이렇게만 되는 거야. 근데 나는 질투가 버겁고 한 번도 동력이 된 적 없고 지치게만 하는 거였거든. 그래서 질투하는 대신 인정하고 아름답게 이 모든 걸 포용한다는데 마음이 더 기울어져 있었어. 근데 그렇다고 쓸 수가 없는 거야. 왜냐면 쌤이 그걸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 같았거든. 뭐가 됐든 뭔가를 주장해야 한다고 할 거 같고, 이 글을 쓴 이유가 뭐냐고 다그칠 것 같고 끝내는 우스워할 것 같았어. 찌질한 속마음을 고백한 것을 후회할 것 같았어. 왜냐하면 쌤은 ‘좋은 생각’에 실릴 것 같은 글을 낮게 보는 경향이 있거든. 근데 그 얘기에도 어느 정도 공감해. 누구나가 따뜻한 마음을 먹고 쓰면 써지는 글은 내가 쓰지 않아도 되는 글이긴 하니까. 그나마 ‘질투는 나의 힘’ 정도의 결론이어야 쌤이 이해해 줄 것 같았어. 그치만 이것도 내 진심은 아니라는 걸 쌤은 눈치챘을 거야.


    그래서 안 갔어. 내가 그 수업을 들으려고 했던 건 내가 쓰는 글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어. 글의 쓸모를 확인하고 싶었달까. 이 글이 남들이 읽을만한 글인가. 이 글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인가. 이 세상에 쓰여 나와도 되는 글인가. 그걸 확인해서 계속해서 글을 써내고 싶었어.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었어. 근데 결론적으로는 이런 내 생각부터 모순이었어. 나는 결론적으로 내 글의 쓸모를 거부했으니까. 이번에 깨달은 건 내게 글쓰기란 거의 80%의 비중으로 나 자신을 위한 거라는 거야. 쓰는 동안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 쓰여진 글 자체에서 얻는 위로와 응원. 거기에 읽는 사람이 조금이나마 재미를 느끼고 내 마음에 공감을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는 거지. 사실 여기까진 이미 알고 있었어. 여기에서 더 나아가고 싶었는데, 더 나아갈 데가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지. 


   그래서 안 갔어. 아마 유종의 미라던가 개근 따위에 집착했다면 오늘 이 글을 쓰지도 못했을 거야. 거미줄에 걸려 버둥대는 곤충의 팔다리처럼 키보드 앞에서 잔뜩 쫄은 채 애처롭기만 했을 거야. 꼬여만 가는 마음속을 달랠 길 없이 답답했을 거야. 


    안 갔어, 안 갔는데 마무리가 잘 된 느낌이야. 마지막 수업을 결석한 그날 이후로 며칠간은 구제불능처럼 느껴지는 나 자신 때문에 우울감이 들기도 했고 이대로 글을 안 쓰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어. 부정적인 생각만 들더라고. 이 세상에 좋은 글, 읽을만한 글이 많은데 굳이 나까지 왜 글을 쓰냐 뭐 이런 생각까지 했으니까. 근데 어제 자기 전에 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안 갔어’라고 시작하는 자기변명이자 셀프 위로. 이 글을 쓰고 나면 홀가분해질 거라는 생각에 쓰지 않고도 마음이 편했어.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마지막 수업을 듣고 난 기분이야. 내 글과 나 자신에 대해 더 분명해진 기분이야. 앞으로도 그냥 쓸려고. 내 멋대로 마구. 그래서 안 갔어.



#에세이 #유즈풀 #그냥하고싶은것들의쓸모